병산서원 사적 제260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이 선조 8년(1575)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 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 모습이다. 류성원은 선조때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그를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판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講學)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祭享)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1년(1863) 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때 홍선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단중 하나이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에 서있는 것은 서원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庫直舍)이고, 입교당의 서쪽 뒤편에 서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이다.
입교당의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尊㯖祠)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있다. 열려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이름나있다. Calen 드림. 이 복례문을 통하여 만대루 로 가고 병산서원에 갈 수 있다. 만대루 만대루(晩對樓)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이다. 200여 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깍아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중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광영지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 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형태의 연목이 조성되어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속의 정원이다. 나무계단이 특이하며, 잘 보존 되어 왔다. 이곳에서 200 여명이 목 마루에 앉아 수업을 했고, 내다 보이는 사방의 경치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보호수와 서원의 한옥, 운치가 돋보이죠? 여기에 있는 나무 잎에서 흥망성세(興亡盛世)가 보이는 듯함은 어인 일일까 ? 툇마루의 운치(공기가 통하게 구명이 있다) 다시 보아도 이 나무 계단이 자연과 어우러져 운치가 있다. 유네스코인천 협회장 하석용박사의 멘토는 명 강의였다. 옛날 재래식 화장실(변소) 유네스코 인천협회장 하석용박사가 병산서원의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뒷간 (현재의 화장실) 낙동강에 드리워진 반영 내~내 건강하세요! 2016년 6월 4일(土) 출사. Calen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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