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근린공원에 있는 수도국산 박물관 과 달동네 수도국산은 소나무가 많다는 뜻으로 만수산(萬壽山)또는 송림산(松林山)으로 불렀다. 수도국산 인근에 솔 고개라는 뜻의 송현동과 소나무 숲이라는 의미를지닌 송림동등의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인천은 원래 우물이 적고 수질이 좋지 않았는데 개항이후 급격하게 증가한 인구로 물 확보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제국 시기 중앙관청인 탁지부에서 1906년에 수도국을 신설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수도국산이란 명칭은 1909년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벌인뒤 산 꼭대기에 수돗물 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 하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수도국산 달동네의 유래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인 갑진년(1904)에 왜병이 전환국(현재 전동)근처에 주둔했는데 이때 이 곳 주민들을 간제로 철거시켜서 송현동 산 언덕에 새로운 주거지를 정해 주었다고한다.
고일의 인천석금(1955) 송현동 달동네에 대한 기록으로 고일이 인천의 근대화 과정을 기록한 인천석금에서 찾을수 있다.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한 한국인들은 인천 동구 송현동, 송림동과 같은 신설 마을을 찾았고 비탈진 소나무 숲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 변모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들었으며 1960~1970년대에는 산업화와 함께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이주 하였다. 산꼭대기까지 작은 집들이 생기면서 181,500㎡ 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가구가 모둠살이 를 하였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 동네가 되었다. Calen 드림.
당시의 달 동네
달 동네 재 구성 전시관
산 동네에 부부가 연탄 배달을 하고 있군요
엄마의 귀가를 기다리며 누나 등에 업힌 모습이 둘다 다 안쓰럽군요 철거 당시 허물어진 담을 통해 본 달 동네
박물관 에 재구성 전시된 당시의 현황
학생 교복과 흑백사진도 있군요
한때 집집마다 달았던 문패가 보이네요
당시 연탄을 나르던 지게 와 설탕을 녹여 만들고 있는 기구와 넝마주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달 동네의 구멍 가게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 밥을 하고 있는 어머니 상
모여 앉아 가내 공업인 부업을 하고 있다
물 장수와 물 배달을 하는 사람
소박한 살림 살이
벽에 옷을 걸어 놓고 수 놓은 천으로 먼지도 가리고 방 내부를 말끔하게 보이기 위한 주부의 정성이 담겨 있군요
보리밥도 한때는 귀했지요
그 옛날의 화장실(뒷간 또는 변소)
달 동네에 미싱이 있으면 그래도 살만한 집이였죠 보아하니 이 집은 옷 수리점 이였던 것 같군요
항아리의 정갈함이~~~
부엌 살림이 제법 구색을 갖추었군요
젖 갈 장수도 있고~~~
그 시절 절찬리에 사용 되었던 비닐 우산
빙수 기계도 있고~~~
주부들의 스트레스 해소 장소였던 우물
그 옛날 김장철 이면 이웃도 거들어 함께 배추 2~3접 씩은 예사로 담았지만 지금은 사철 배추가 나와 10~20포기 안팍 ~참! 주부들이 편해졌다
전기가 귀하던 시절 석유를 사용하는 램프 불이면 아주 밝았고 카바이트 등을 쓰면 더더욱 밝아 탄성이 나왔지만 끄름이 많아 아침에 ㅋ를 풀면 끄름이 한 가득~~~
실로 주부들이 옷을 많이 떠 주던 시절이 있 었고 헌 옷을 풀어 주전자 뚜껑을 통해 스팀을 쏘여 실을 뽑아내면 새 실로 재생되어 새로운 옷을 떠 주기도 했다.
겨울의 별미인 군 고구마 틀
솜 틀던 기계???
당시 유행했던 패션
50~60년대 사용하던 카메라 (당시 패트리카메라만 해도 좋았다)
그 옛날 지붕을 덮었던 스레트와 골 함석 테라스를 덮던 라이트가 정겹게 다가오는 군요
오늘 답사는 향수를 불러 왔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Calen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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