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江華山城)
1964년6월10일 사적 제132호로 지정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국화리, 남산리, 신문리 일원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이다.
고려 제 23대 고종이 13세기 몽골의 제 2차 침입(1232)에 항전하기 위하여 고려의 백성과 국토가 유린 되자 당시 무신 정권 집건자인 최우는 1232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고,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당시에 성은 흙으로 쌓았고, 강화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고, 외성은 1233년 강화도 동쪽으로 흐르는 강인 염화강을 따라 쌓았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외성은 몽공군이 해전에 약한 것을 고려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은 중요한 방어 시설이자,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39년 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 받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11년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환도 하게 되면서 몽골과 고려의 강화 조약에 조건으로 강화도에 지은 성을 모두 허물게 되였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 강화 산성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다시 축조하였다.
인조15년(1637)병자호란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 당하였고, 효종3년(1652)성곽 일부를 수축하고, 조선 후기 숙종3년(1677) 유수 허질이 전면을 돌로, 후면은 흙으로 넓혀지었고, 개축 길이가 7,122m에 이른다. 4개의 내성인 남문 안파루, 북문 진송루, 서문 첨화루, 동문 망한루가 남았고, 비밀 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 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고,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 북쪽 산 자락은 잘 보존되어있다.
그 외 중성과 외성은 대부분 밭이 되거나 담 벽보다 낮은 수준으로 남고 그 위에는 나무가 자라 가까이 보지 않는 이상 잘 찾지 못 할 정도로 훼손됐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 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Calen드림.